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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에서는 보통 높은 순위로 뽑힌 선수들이 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낮은 지명도와 팬들의 외면을 받으면서도 꾸준한 노력으로 국제대회에서 미국을 이기고, NBA를 지배한 아르헨티나의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마누 지노빌리라는 아르헨티나의 스포츠 스타입니다. 축구계의 레전드 메시가 본인은 축구계의 지노빌리라고 일컬을 정도의 레전드 선수인 지노빌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NBA에 가기까지
지노빌리는 1977년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바이아 블랑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축구 열풍이 불고있던 곳에서 지노빌리는 아버지와 형의 영향으로 농구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10살 때부터 마이클 조던의 영상을 접하면서 완벽한 농구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체적 성장이 빠르지 않았고, 실력과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지노빌리는 승부욕이 강해서 스피드와 공격을 집중적으로 단련해 일찍 히 18살의 나이에 프로선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빠른 성장을 이룬 그는 20살 때 21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되어 농구월드컵에 참가하게 됩니다. 거기서 NBA스카우터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행선지를 이탈리아로 정하여 2부 리그 비올라 레지오 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입단한 시즌에 바로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킵니다. 그 이후 바로 1999년 NBA에 드래프트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드래프트에 뛰어든 선수는 58명이었고, 지노빌리는 57순위로 거의 꼴찌였습니다. 다행히 국제무제무대에서 지노빌리를 관심을 가졌던 스카우터가 지노빌리를 뽑아주었지만, 팀의 전략적 선택으로 지노빌리는 방치되었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훗날을 기약했습니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으로 MVP를 차지하고 팀을 우승시키게 됩니다. 유로리그에서까지 활약을 하면서 1패만을 하면서 결승전까지 올라 우승까지 차지하고 맙니다. 하지만 NBA에서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잡게 되는데 2002년 월드컵이 그 기회였습니다. 거기서 NBA스타를 보유하고 있던 독일과 중국을 이기고, 미국까지 이겼습니다. 무릎부상을 참으면서 활약을 한 지노빌리 덕분이었습니다. 우승은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준우승과 최고의 선수 5명에 오르며 샌안토니오의 관심을 이끌어 냈고 정식계약을 통해 NBA에 입성하게 됩니다.
지노빌리의 활약
지노빌리는 관심을 받았지만 엄격한 통제하에 팀이 운영되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스타일은 지노빌리의 창의적인 스타일과 맞지 않아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초반에는 팀 스타일과 맞지않아 많은 경기를 뛰지 않았지만, 점점 팀과 호흡이 맞고 중요한 클러치 타임에 활약을 하기 시작하면서 감독의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노빌리는 첫 시즌부터 정규시즌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고, 당시 최강팀 LA레이커스를 꺾고 우승까지 이끌었습니다. 이제 지노빌리는 팀의 주축선수로써 인정을 받아 샌안토니오에서 활약을 하게 됩니다. 또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미국을 쓰러트리며 우승을 차지하는 업적을 이룹니다. 2004-05 시즌부터 핵심 3인으로 선정하고 매 경기 지노빌리를 출전시키게 됩니다.
지노빌리의 업적과 은퇴
빠른 돌파력으로 적팀 골밑을 위협하고 다녔던 선수입니다. 상대의 피지컬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승부욕을 가지고 저돌적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현재 유로스텝이라 불리는 슛을 정교하게 다듬어 적립한 선수입니다. 그리고 뛰어난 3점 실력과 클러치타임에서의 집중력이 뛰어나 팀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릎부상을 당하고 말았고 벤치맴버로 내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최강의 벤치 자원으로 엄청난 활약을 펼치게 되었고 선수로테이션에 대한 뜻하지 않은 기발한 전략으로 인해 그 해 우승을 또다시 차지하고 맙니다. 지노빌리는 36살 2014에 우승을 차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전성기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40살까지 본인의 자리에서 활약을 하다가 은퇴를 하였고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그의 등번호 20번을 영구결번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노빌리는 커리어동안 4번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아르헨티나의 영웅은 이렇게 NBA를 떠나게 되었습니다.